책 제목 | 이방인 X 페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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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알베르 카뮈 |
읽은 날짜 | 2020년 4월 24일 |
읽은 페이지 | 9 ~ 127 |
20세기의 지성이자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 알베르 카뮈.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리다.낯선 인물과 독창적인 형식으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 '이방인'처럼 나타난 소설. 젊은 무명 작가였던 알베르 카뮈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마주하는 실존의 체험을 강렬하게 그린다. 카뮈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기존의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알제에서 선박 중개인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는 뫼르소. 그는 교육을 받았지만 신분 상승 욕구나 야심이 없고 생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상할 정도로 주위에 무관심한 청년이다. 그런 그는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후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데, 변호사와 재판관, 사제 등 그를 도우려는 누구도 뫼르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또한 주위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카뮈는 이처럼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뫼르소의 삶, 죽음에 이르러서야 신앙과 구원의 유혹을 떨치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똑바로 마주하게 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억압적인 관습과 부조리 속에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yes24 책 소개에서 발췌
난 지난 12월 자율자동차 대회를 우승하여 문화상품권 10만원을 받았다.
사실 우승한 것이 12월이고, 상금은 내가 독감(코로나19는 아니다)에
걸려 못 나오는 동안 모 학생이 맡고
있다가, 2월에 학교에 나와서 자습을 하면서 이미 다 써버려서 못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극적으로 내게 전달되었다. 실은 그렇게 받은
돈마저도 두 달 가량 안 쓰고 있다가 책을 사기 위해 쓰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벼운
책과 약간의 고상한 책을 샀는데 고상한 책 중 하나가 이방인 X 페스트이다.
왜 그 책이었는가? 그거야말로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사항이지만 굳이 밝혀두자면
반은 계획적이고 반은 충동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시국'을 맞이하여 나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제대로 개학도 하지 못하고 집(혹은 독서실)에 틀어박혔는데,
4차 산업혁명 때문인지 그런 상황에도 학급 내의 소통은 ―― 개학한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 꽤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사고를 넓히고 영혼을 풍부하게 할 글들을 흩뿌리고 계셨는데 그 중 소설 페스트에
대한 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이제 와서는 무슨 글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시의적절함만은 가슴 속 깊이 남았다. 그리고 그 자국은 마침내 4월 21일, 어느 대형
서점의 치밀한 마케팅에 의해 한 소비자의 지출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그 소비자는
이벤트로 한정 판매하던 '세계 책의 날 배지'를 받을 수 있어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스트라는 시의적절한 고전을 읽으려는 내 의지는 너무나도 쉽게 지연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인즉슨 나의 고지식한 독서 습관 때문이었다. 또한 내 의지는 고작 책의 구성 따위에 의해 지연될 정도로 가벼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페스트보다 앞서서 나오는 이방인을 먼저 읽게 되었다.
책을 읽고 이렇게 열심히 쓰는 것은 주로 일기이거나 추천의 글이고, 따라서 학교를 처음 졸업한 이후 내 글에 소설의 줄거리가 자세히 실리는 일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책의 줄거리를 알고 싶다면 책을 직접 읽어보거나 친애하는 나무위키를 읽는 게 낫다. 그것도 귀찮다면 내가 앞에 친절히 실어놓은 발췌를 읽는 것으로 만족해라.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책의 시작이다. 주인공의 성격에 따라 첫 문장의 인상깊음이 결정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난 그런 책을 두 권 읽은 것에 불과하므로 별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문장이 인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다른 서평에 대해 찾아보면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이 문장에 대해 인상깊었든 아니든 이 문장이 서술자인 주인공 뫼르소가 느낀 그대로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후로도 주인공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덤덤하다는 것은 절제적이라는 것이다. 표현은 자타를 가리지 않고 절제적이며 객관적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라서 뫼르소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인간성이 본래 그런 것이다. 어떤 풍경이 자세히 묘사된다거나 그런 부분은 전혀 없다. 그런 문체를 나는 일기 같다고 느꼈다. 내가 겪은 일이고 내가 아는 일을 나 혼자 읽을 글에 자세히 쓰는 일은 없다. 난 소설이 그런 일기와 같다고 느끼면서 주인공이 보는 광경은 역설적이게도 생생하게 그려졌다. 사람 얼굴을 그릴 때 자세한 것을 생략한 것이 더 보기 좋다고 느끼는 것처럼, 오히려 덤덤한 묘사가 나의 정서에 들어맞아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진 것이다. 마치 겪은 일을 회상하듯, 생생한 광경을 내 뇌는 멋대로 그려내고 있었다.
사실은 책의 묘사가 생생했던 걸까. 뫼르소가 느낀 감정과 감각도 생생했다. 뜨거운 여름 하늘 아래 이글거리는 길을 걸으면서 머리가 핑 도는 더위를, 뫼르소와 함께 느꼈다. 뫼르소 특유의 무기력한 성격이 나의 기분과 맞닿아있던 것인지, 소설을 읽고 난 뒤에 실제로 얼마간 무기력한 기분이 들었다. 피곤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그 피로감조차 뫼르소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할 만큼 소설과 나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험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속 인물과 동화하는 것은 어렸을 적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겪은 것과 같았다. 이 정도로 이야기에 몰입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굉장히 몰입감 있는 책이었지만 마지막에 카뮈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알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잠깐 고민해보았으나 수업이 끝나자마자 책을 읽은터라 그런 어려운 것을 생각할 체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곧 인터넷으로 이방인을 검색하였다. 그다지 마음에 와닿는 메시지는 없었다. 메시지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만일 이 글을 읽으며 그 메시지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런 건 알아서 읽어보고 생각하거나 다른 고상한 독자의 글들을 찾아보라고 말하겠다.
부원들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은데 한꺼번에 쑤셔넣으면 탈이 날 것이 분명하기에 오늘은 정말 간단한 것들을 알려주게 된 것 같다. 여러분과 마찬가지의 입장에서 나만의 웹페이지를 만들어보고자 했는데, 내용과 형식의 균형이 무너져버린 것 같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형식이 주를 이루는 글을 썼어야 했는데, 오늘 배운 것으로는 도저히 그런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뭐, 그런 같잖은 이유로 장황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며 생각한 것인데, 웹을 배운 사람이라면 워드 프로세서 프로그램(한글, 워드 등) 대신 HTML로 글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쉰지?
…라고 썼던 게 저번이고, 아무래도 글 하나 딸랑 있는 게 좀 빈약한 거 같아 여러가지를 풀기로 했다.